다시 보다: 25+50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4K 리마스터링> 류승완 감독, 영화를 통해 만나는 다음 세대
5월 4일 CGV 전주고사 1관에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4K 리마스터링> 류승완 감독의 전주대담이 진행되었다. 전주국제영화제의 25주년과 한국영상자료원의 설립 50주년을 기념하는 ‘다시 보다: 25+50’ 특별전의 일환이다. 네 편의 단편영화로 구성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200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되었던 류승완 감독의 데뷔작으로, 전주의 초창기를 빛낸 네 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그의 초기작 특유의 거칠고 매력적인 필체를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다는 소식에 예매 경쟁은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이날 진행을 맡은 김영진 영화평론가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디지털 리마스터 버전이 공개되었던 제17회 전주국제영화제 당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류승완 감독과도 막역한 사이인 그는 영화에 대한 심도 있는 감상과 감독과의 에피소드를 적절히 배합해 대화를 노련하게 이끌어갔다.
상영관을 가득 채운 관객들은 상영이 끝난 후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로 류승완 감독을 맞이했다. “영화의거리를 걸으니 24년 전의 기억이 떠오른다”며 입을 연 류승완 감독은 차분한 목소리와 정갈한 언어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제작 과정을 회고했다. “바로 장편을 찍기에는 돈이 없었기에 긴 이야기를 네 조각으로 나누었다. 먼저 단편 하나를 만든 후 영화제에서 입상한다면 그 상금으로 다음 단편을 찍겠다는 계산이었다. 90년대 당시 미국 독립영화계의 조류와도 연관이 있다. 짐 자무쉬의 <천국보다 낯선>과 같은 여러 중단편을 연결하는 형식, 로버트 로드리게스가 생동성 시험에 응하며 제작비를 마련해 <엘 마리아치>를 찍은 일화 등의 영향을 받았다.”
류승완 감독에게 ‘액션 키드’라는 별명을 붙인 장본인이라는 김영진 평론가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제작 과정을 “영화를 향한 패기와 현실에 대한 냉정한 관점으로 돌파한” 사례라고 평했다. 이에 류승완 감독은 “청춘의 패기가 만들어낸 영화”라고 화답했다. “‘정말 마지막이다, 영화판을 떠나도 되니 이것만은 꼭 만들고 싶다’는 마음으로 제작한 영화다. 내가 이 영화를 지금 다시 만든다면 기술적으로는 더 말끔해지겠지만, 원본보다 뛰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김영진 평론가는 “1998년 무렵 장르의 관습을 새롭게 만들고자 하는 자그마한 흐름이 단편영화계에서 관찰되었다”며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그 계보상의 뛰어난 성취로 인식했다. 류승완 감독은 “80년대 한국 독립영화 진영은 정치적으로 견고한 일종의 엘리트 집단이었다”고 회상했다. “나같이 문화원 대신 동시상영 극장에서 영화를 배운 사람들에게는 큰 벽이 느껴졌다. 90년대에 들어서며 정치적 선언으로서의 영화보다 장르적인 문법을 풍부하게 활용한 단편영화가 등장했다. 봉준호의 <지리멸렬>이나 장준환의 <2001 이매진>, 송일곤의 <소풍> 등의 작품을 꼽을 수 있겠다.”
뒤이어 관객들이 직접 질문을 던지는 대화 시간이 마련되었다. 영화를 공부하는 많은 학생들이 류승완 감독을 롤 모델로 꼽는 만큼, 상영관은 그의 조언을 청하고자 하는 젊은 영화인들로 가득했다. 한 관객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와 같이 20대의 열정을 담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며 영화계의 선배로서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이런 질문이 나올까봐 참 두려웠다”며 가볍게 웃은 류승완 감독은 이내 “일단 만들라”는 말을 힘주어 반복했다. “비관하고 좌절하고 분노할 시간에 끝없이 읽고 보고 써야 한다. 냉혹한 피드백을 받아보는 것도 중요하다. 맷집을 키워야 자신이 원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다. 감독이라면 스스로가 다치더라도 자신의 영화는 다치지 않게 보호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류승완 감독만의 시나리오 작업 방식에 대한 질문도 제기되었다. “시나리오 공부에 가장 도움되었던 것은 필사였다. 좋아하는 영화를 틀어놓고 그대로 옮겨 쓰는 과정에서 독특한 지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뒤이어 아무리 힘들어도 매일 글을 썼다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성실성을 언급한 류승완 감독은 시나리오 작법의 왕도 역시 “계속 쓰는 것”이라 강조했다. “가장 좋은 것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취재도 중요하다. 길거리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계속 자신의 경험치를 늘려야 한다.”
한국형 액션영화의 한 획을 그은 감독과 한국영화의 미래를 이끌어갈 세대간의 교감은 류승완 감독의 짧은 인사말로 마무리되었다. “관객분들 중 이 영화가 만들어진 이후에 태어나신 분들도 있을 것이다. 영화를 통해 제 다음 세대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감격스럽다. 동시에 눈앞의 현상만 신경쓸 것이 아니라 더 멀리 보며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느낀다.”
[글 박수용 /사진 오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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