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에서 ‘미망’을 찾아보면 모두 네 개의 뜻이 나온다. 영화는 이 중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남편은 죽었으나 따라 죽지 못하고 홀로 남아 있음’을 제외한 나머지 정의를 주제로 세 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동음이의어를 사용해 세 가지 짧은 이야기를 변주해 구성하기로 한 아이디어는 어떻게 나오게 됐나.
영화 첫 번째 파트 마지막 촬영 날 〈미망〉의 전체적인 구조를 떠올렸다. ‘서울극장으로 간 여자(이명하)는 어떻게 됐을까’라는 질문은 ‘그녀가 모더레이터로 참여하는 영화는 어떤 영화일까’로 이어졌다. 물론 첫 번째 파트와 두 번째 파트 사이엔 시간 차가 있지만 여자가 서울극장으로 들어오는 장면을 통해 영화적으로 둘 사이를 이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박남옥 감독의 〈미망인〉(1955)을 대상 영화로 정했는데, 이는 〈미망인〉 역시 서울 거리를 걸으며 진행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박남옥 감독 영화가 〈미망〉의 모든 파트에 동일하게 등장하는 이순신 동상과 같은 역할을 하게 하려 했다.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미망’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다시금 찾게 됐고, 그 의미가 이 영화의 각 파트와 맞닿아 있다고 느꼈다. 영화의 구조를 먼저 떠올리고, 영화를 만들어가는 과정 중에서 ‘미망’이라는 제목을 발견하고 받아들이게 됐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미망(微望)’은 사전에 없는 뜻으로, 표의문자인 한자의 특성을 활용해 개인적으로 만든 제목이다. 뜻은 ‘작은 바람’으로 영화 속 인물들과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들에게 내 작은 바람을 담아 보내고 싶었다.
〈미망인〉이 시작할 때 등장하는 “수렁에 빠졌을 때라도 그는 해바라기였다.”라는 문구가 영화에 직접 인용되기도 한다. 〈미망인〉의 어떤 점을 차용하려고 했나.
〈미망〉의 인물 모두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한다. 기대했던 것들은 번번이 기대를 저버리고, 기대하지 않았지만 공교롭게 그것이 또 다른 기회가 돼 지금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모두 수렁에 빠진 것과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는 어떻게든 돌고 돌아 자신(해바라기)을 마주한다. 〈미망〉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미망인〉의 인물들 역시 원했던 것과 다른 결론에 다다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는 점이 내게 와닿았다.
영화엔 전작인 단편 〈달팽이〉(2020)와 〈서울극장〉(2022)이 포함돼 있다. 단편들을 연결해 장편으로 만들면서 염두에 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까?
4 년이란 시간의 흐름이 관객에게 다가가기를 바랐다. 하나의 예시로 첫 번째 파트(낮) 배경에 한창 공사 중이던 장소들이 두 번째 파트(밤)에선 공사가 끝나 빌딩이 된 것을 인물 동선과 같은 카메라 움직임으로 담았다. 이런 부분들이 인물 간 대화나 그들이 겪는 삶을 조금 더 다층적이면서 풍부하게 만들 거라고 생각했다.
영화는 사라지는 것과 그럼에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것에 대해 그린다. 특히 사라지지 않는 것으로 ‘공간'의 힘에 주목한다. 세 개의 장 모두에서 서울 광화문과 종로가 등장하고, 영화는 종로에서 시작해 광화문으로 장소를 옮겨간다. 그리고 이들 공간은 변화하나 결코 변하지 않는 공간으로 영화 속에 존재한다. 이들 공간에 주목한 이유는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광화문과 종로 일대를 좋아한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혼재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간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그러한데, 길을 걷거나 어느 가게에 들어가면 젊은 사람부터 어르신까지 넓은 층과 마주하게 된다. 나는 이런 것들에 마음을 빼앗긴다. 공간 자체에 기억과 이야기가 묻어 있고, 그 공간 속 사람들에게도 수많은 이야기가 존재한다. 그래서 〈미망〉에서 남자와 여자가 걸을 때, 배경의 공간이 두 사람의 기억을 은유하기를 바랐다. 사라지고 변화하고, 끝내 사라지지 않는 것들은 공간이면서 공간에 깃든 기억이기도 하다.
영화 속 남자(하성국)와 여자는 종로와 광화문 골목을 주로 누빈다. 로케이션 특성상 현장을 통제하거나 조율하기 어려웠을 듯하다. 촬영에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까?
키 스태프들과 로케이션 답사를 통해 현장 변수들에 대비했다. 주요 공간에서의 요일과 시간에 따른 유동 인구와 차량 흐름, 상가들의 개점과 마감 시간, 신호등 점멸 간격 등을 파악해 촬영 스케줄에 반영했다. 촬영은 지나치는 사람들을 모두 통제할 수 없을 것을 예상하여 롱테이크의 스토리보드를 구상했다. 롱테이크 특성상 로케이션에 위치한 상점과 가로등만으로는 촬영에 적합하지 않았기에 실외 밤 장면에서 긴 구간 곳곳에 원래 그곳에 있을 법한 자연스러운 조명을 설계했다. 두 번째 파트의 경우 부처님 오신 날을 촬영일로 선택했는데, 연출적인 의미가 있는 선택이기도 했지만 거리에 설치된 연등이 어두운 밤을 밝혀주기 때문이었다. 현장 녹음은 무선 마이크를 활용하고, 배우 동선 곳곳에 마이크를 설치했다. 후시 녹음이 아닌 현장 사운드를 최대한 살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현장 제약이 많았기에 배우들과 테스트 촬영을 각 파트별로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했다. 연출적으로는 이동 구간에 따라 대사 길이를 조정하고, 걷다가 멈추는 인물 동선들을 통해 기술적인 부분과 합을 맞췄다.
영화 배경이 되는 상가들에 미리 협조를 받아 일하는 분들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담을 수 있었지만 촬영 당일 오가는 시민들에겐 촬영 전 제작 스태프들이 카메라 화면 바깥에서 협조를 요청했다. 흔히 현장 통제에서는 “촬영 중이니 잠시 기다려달라”는 부탁을 하는 반면, 우리 현장에서는 거기에 더해 “지나간다면 영화 배경에 등장하게 되는데, 출연이 괜찮다면 카메라를 바라보지 않아달라”는 요청을 더했다. 스태프들도 출연했는데, 이는 움직이는 인물과 카메라에 따라서 통제해야 하는 부분이 생기면 곧바로 조치를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통제해야 하는 상황은 촬영 길이를 위한 신호등 확인이나 갑자기 나타난 오토바이 등이었다. 촬영을 하면서 많은 분들이 흔쾌히 도움을 주었다. 자세히 보면 종종 카메라를 바라보는 분들을 발견할 수 있다.
4년여의 긴 촬영 기간 동안 어떤 것들을 염두에 두었는지 궁금하다.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서 배경이 되는 상점들과 촬영 베이스가 될 주변 상가들에 촬영 협조를 받았다. 적은 예산으로 협조를 받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상가 주인 분들과 가까워지는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는데, 특히 영화 속 마지막 공간인 ‘소우’와 주변 상가 분들과 친분을 형성하려 1 년 정도 찾아뵈었다. 그 결과 마치 세트장처럼 촬영에 임할 수 있었다. 로케이션 특성상 대체할 수 있는 다른 공간이 없었고, 또 실제 공간들을 담아야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울극장의 경우는 코로나 방침으로 인해 섭외와 촬영이 불가했고, 방역 수칙이 완화되었을 때는 이미 폐관한 상태였기 때문에 극장 내부 장면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협조를 받아 대체했다.
4년 동안 공간 변화를 체크하고 거기에 맞춰 시나리오를 수정해 반영했다. 공간이 변화함에 따라 이야기도 조금씩 달라지게 된 셈이다. 비단 공간뿐만 아니라 날씨에도 영향을 받았는데, 운이 좋게도 촬영을 할 때면 언제나 비가 내려서 영화적으로 큰 도움을 얻었다.
4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해서 배우들과 그 시간 내내 영화를 준비한 것은 아니다. 한 파트를 촬영할 때마다 다시 모여 영화를 준비하고 촬영에 임했는데, 자연스레 배우들이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 담겼다. 또 외형뿐 아니라 인간적으로 성장한 모습도 연기에 녹아든 듯하다. 연기 디렉팅은 배우마다 다르게 했는데(이건 배우 개개인이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공통된 주문은 “현장을 느끼고 반응해달라”는 것이었다. 통제가 불가능한 것들에 대해서는 받아들이고 그에 맞게 반응하자는 주문을 배우들이 고맙게도 잘 수용해줬다.
세 이야기는 각각 낮 시간, 밤 시간, 오후에서 밤으로 이어지는 시간을 다룬다. 각 장을 특징 짓는 톤이 있었을까? 어떤 색감을 중심에 두고 이미지를 쌓으려고 했나.
영화의 구조를 처음 떠올렸을 때 시간의 흐름을 생각했다. 각 장마다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형식이므로 첫 번째 파트와 두 번째 파트의 물리적인 시간은 몇 년이 흘렀음에도 낮에서 밤으로, 그리고 세 번째 파트에서 다시 날이 밝아 낮에서 밤으로 이어지는 듯 보이게 하고 싶었다. 일상의 한 단면들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아주 멀리서 바라보면 하나의 고리로 연결된 것처럼 말이다. 그 공간들을 연결하는 것은 달리는 버스, 택시 등의 탈것이다. 버스나 택시의 차창 밖으로 공간들이 흐르는 모습이 시간이 흐르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영화는 버스에서 남자가 내리면서 시작하고, 여자와 남자가 여러 탈것을 오르내린 후 결국 남자가 버스에서 내리는 것으로 끝난다.
각 장을 특징 짓는 톤은 의상과 소품의 색이었다. 남자의 녹색 반팔 티, 빨간 우산, 여자의 붉은 원피스, 하늘색 원피스처럼 제목이 나오는 각 장에서 배경색으로 톤을 정했다. 이 색들은 빛의 삼원색이기도 한데 붉은색, 녹색, 파란색을 더하면 투명한 빛이 된다는 점이 영화의 정서와 맞닿아 있다고 느껴졌다. 영화에 나오는 계절과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의 흐름들이 싱그럽고 따뜻한 여름(탄생, 젊음)에서 시들고 추운 겨울(죽음, 늙음)로 가고 있다. 물론 다시 봄이 오겠지만 이러한 반복이 같은 것 같아도 조금은 달라지고 있는 우리의 일상처럼 표현되기를 바랐다.
지난해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관객과 만났다. 해외 관객의 반응은 어땠나.
언제든, 어디서든, 누구든 관객을 만나는 건 ‘기적’과 같은 일이다.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토론토에서 만난 이들은 극장에서의 첫 관객이기에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듯하다. 오래 기억하기 위해서 관객 Q&A가 끝나고, 관객 분들께 요청해 객석 사진을 찍기도 했다. 두 번의 상영 모두 전석 매진이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취소 표를 구하려 극장 밖에 줄을 서 있던 관객 행렬도 잊지 못한다. 무대 인사 전, 극장 통로에 서 있을 때 나와 동료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응원하던 관객들도 기억난다. 영화 상영 전 객석에서 응원가처럼 노래를 부르고 박수를 치는 등, 마치 스포츠 경기를 보는 것 같은 관람 문화도 신기했다. 이렇게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들인데 영화가 정적이라 심심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상영 내내 작은 순간과 표현에도 크게 반응하는 극장 분위기에 안심했다. 추후 영화제 프로그래머로부터 열정적으로 영화를 보는 것이 토론토만의 관람 문화라는 것을 전해 들었다. 개인적으로 영화제 관객상에 대한 명예가 남다르게 높은 건 이런 문화의 일환이겠거니 유추해볼 수 있었다. 관객과의 대화 이후에도 극장에 남아 질문을 더 하고 자신들의 견해를 전하는 이들도 많았다. 또 극장 밖에서도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이 저마다의 영화를 즐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기뻤던 건 할아버지, 할머니 관객이 영화를 재밌게 봤다는 것이다. 토론토를 시작으로 방문한 여러 해외 영화제에서 나라마다의 문화 차이로 인해 영화를 받아들이는 반응이 제각기 달랐던 것도 좋은 경험이 됐다. 그래서 전주에서 만난 관객 반응은 어떨지 또 다른 마음으로 고대하게 된다.
단편을 만드는 것과 장편영화를 제작하는 것의 차이가 있나. 차기작을 구상 중인지도 궁금하다.
제작하는 것 자체에 차이를 느끼지는 못한다. 이야기의 특성 자체가 다르다고 느끼는데 단편은 시 같다면 장편은 단편 소설 같다고 생각한다. 다만 언젠가 나만의 영화 언어를 찾아 이를 능숙하게 구사하게 된다면, 시처럼 표현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차기작은 장편 〈서울 이야기〉와 단편 〈나만 아는 춤〉을 준비하고 있다. 〈서울 이야기〉는 아들 부부의 이혼을 말리러 서울에 온 여자가 손녀와 함께 서울을 유랑하는 얘기다. 아들 부부는 〈미망〉의 남자와 여자를 연기한 배우 하성국과 이명하가 맡았다. 〈미망〉에서 확장된 세계라고는 할 수 없지만, 두 작품을 느슨하게 잇고 싶은 마음이 있다. 〈나만 아는 춤〉은 춤을 가르치는 여자가 춤을 못 추는 남자를 사랑하는 이야기다. 그녀는 그를 이해하고 싶고, 그는 그녀를 이해하려고 서로의 몸짓을 따라 한다. 개인적으로 사람의 춤(몸짓)에 관심이 많은데, 비언어적인 표현이 영화 언어와 닮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하고 싶은 영화는, 지금으로서는 영화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구체적이진 않지만 한 작품씩 만들어 가다 보면 나만의 표현법을 찾게 되지 않을까 여기며 내가 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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