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노의 말
1889년 토리노. 니체는 마부의 채찍질에도 꿈쩍 않는 말에게 달려가 목에 팔을 감으며 흐느낀다. 그 후 니체는 ‘어머니 저는 바보였어요’라는 마지막 말을 웅얼거리고, 10년간 식물인간에 가까운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다. 어느 시골 마을. 마부와 그의 딸 그리고 늙은 말이 함께 살고 있다. 밖에서는 거센 폭풍이 불어오고 매일매일 되풀이되는 단조로운 일상 속에 아주 조금씩 작은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하는데… (2011년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심사위원대상), 국제비평가협회상 수상작)
영화는 니체의 일화로 문을 연다. 1889년 1월, 마부의 채찍질에도 꿈쩍 않는 말을 본 니체는 뛰어가 말의 목에 팔을 두르고 울었다. 알다시피 며칠 뒤 니체는 정신병원에 갇히는 등 마지막 10년을 식물인간처럼 살았다. 벨라 타르는 니체의 후일담 대신 그 말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이어지는 4분 20초의 롱테이크는 타르 식의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다. 거센 흙바람에 맞서 귀가하는 마부와 말과 마차를 가까이 혹은 멀리서 집요하게 포착한 카메라는, 빅토르 시외스트룀의 <유령마차>와 로베르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를 붙여 놓아 실로 경이로운 순간을 창조한다. 단 서른 개의 쇼트로 구성된 이후 140분은 마부와 딸(그리고 말)이 황무지의 스산한 공간에서 보내는 엿새를 담는다. 불을 지피고 물을 길어오고 옷을 갈아입고 말을 돌보고 감자를 먹고 잠자리에 드는 시퀀스를 반복하는 <토리노의 말>은 니체적이면서 동시에 반니체적이다. 종말의 징후, 즉 삶의 시련 앞에서 부녀는 흔들리지 않는 냉엄함과 꺼지지 않는 에너지로 견딘다. 그러나 마부와 딸은, 평생 하층민과 말 한 번 제대로 나누지 않았던 니체가 꿈꾼 고귀한 영혼과 거리가 먼 존재다. 영원회귀, 삶의 시험, 그리고 그것의 긍정(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은 이걸 열정이라 표현했다)을 체화한 <토리노의 말>은 (타르가 희구했을) 무(無)로서의 이미지와 유물론적 영화와 재현 너머의 세계를 완성한다. 삶이 그렇듯 내러티브를 버린 영화에서 우리는, 휘바람에 머리가 날리는 여자와 한 손으로 뜨거운 감자 껍질을 벗기는 남자와 죽을힘으로 버티고 선 말의 삶을 더불어 살게 된다. 영화의 배경보다 4년 전, 고호는 하나의 그림으로 그들의 삶이 얼마나 의미 깊은지 보여준 바 있다. <토리노의 말>은 <감자 먹는 사람들>에 대한 영화적 답이다. 타르는 <토리노의 말>이 마지막 작품이라고 공언했는데, 21세기의 영화는 어쩌면 그의 빈터를 메우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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